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봤지만 개성에 두고온 봄이 생각도 났다. 피난길에서 본 광경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되도록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처마밑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동안 그간 한쪽에 밀쳐뒀던 생각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나왔다. 쌀 한 톨, 장작 한 조각도 나오지 않는 쓸모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pp.178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p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