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덤덤하면서도 애처롭게 잘 쓰신 분이 박완서 작가가 아닐까 한다.
유독 이 책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내용은 '빨갱이 바이러스'에사 화자의 독백형식으로 나오는 글이었다. 분단선 근처에 있는 마을은 손바닥 뒤집듯 남이 되었다가 북이 되었고 그 와중에 가족 몇 사람은 집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배고픈 시절, 고픈 배를 움켜쥐고 밤 몰래 집에 찾아온 가족은, 다른 가족의 냉대와 분노를 받게 된다.
화자 아버지가 삼촌을 진짜 죽였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때론 부정확하고, 가족 모두 이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부분 모호하다. 집의 마당을 진짜 파볼 수도 없다. 진짜 삼촌의 백골이 나오면 그것도 큰일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가족을 이렇게 찢고,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죽여야 했던 시절. 그 시대가 너무나 슬프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잘 살고자 기를 쓰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도태되었고 누구는 중산층으로 올라서 1970년 대에 강남 아파트를 척척 마련한다. 똑같은 집, 똑같은 인테리어, 똑같은 욕망.
모든 것이 파괴된 한반도에서 모델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복제한다. 그것에 박완서 작가님의 단편에 잘 드러나 있다.
이제 박완서 작가님이 돌아가신 지도 10여 년 되었다. 또 한 번 세상은 바뀌었다. 하지만 과거를 잊으면 똑같은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있다. 역사책보다는 말랑하지만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 소설은 그래서 읽어야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