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느끼는 강렬한 취약함 vulnerability 이라는 감각" 때문이다. 태어난다 는 것은 낯설고 위협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세계에 내던져진다는 것인데 유아의 육체적 역량은 세계와 맞서기에 턱없이 부족하므로 타인의 보호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연약한 육체만이 아니라 정 신에도 그에 합당한 보호가 제공되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유년기 인간의 의식은 '상처받기 쉬움' (vulnerability를 이번에는 이렇게 옮겨보자)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그 의식에 제공되어야 하 는 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확신이다. 그러 므로 유년기 인간에게 부모와 그에 준하는 존재가 제공하는 육체 적·정신적 돌봄의 역할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취약함이 정착 감을 갈구하고 정착감이 취약함을 해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 랑을, 더 정확히는 사랑의 필요성을 배운다. pp.275
이 경우 타자애와 자기애는 동전의 양면이다. 나는 나를 사랑해 주는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데 성 공한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 선순환이 실패할 경우 상황은 반대가 된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타자를 미워할 것이고, 그 타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또한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선순 환과 악순환 모두 그 영향이 심대하지만, 후자의 영향이 훗날에 더 크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전언이다. 프로이트에 서정주를 섞어 말 한다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말 한이 실패한 사랑의 역사'다. 최 승자의 시는 이 명제의 탁월한 중거라고 할 수 있다. pp.275
세계가 부정되어야 마땅한 곳일 때, 세계를 부정하는 사람은 옳 다. 내 글쓰기가 그런 부정에 헌신함으로써 나는 그런 이들에 속 할 수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사랑받을 수 있고(즉, 존재론적 정착 감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죽지 않아도 된다. p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