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동정이 같다고 주장한 사람 중에 쇼펜하우어가 있고, 그 둘을 혼동하지 말라고 한 사람 중에 막스 셸러가 있다. 쇼펜하우어 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것 은 '지성'이 아니라 '의지'라고 했다. 생명이 가진 무분별한 욕망 에너지를 그는 '의지'라고 부른다. 의지는 맹목적이고, 그래서 삶 은고통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나와 네가 근원적으로 닮았음을 발 견하는 때, 고유한 '나'는 없고 다만 아픈 '우리'가 있을 뿐임을 깨 닫는 때가 있는데, 그때의 감정을 '동정 Mitleid. 연민'이라 한다면, '사랑'이 그것과 다른 것일 수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모든 참 되고 순수한 사랑은 연민이다." (67절) 물론 "참되고 순수한 사 랑"만이 그렇다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아니라고, 막스 셸러는 말한다. 한국어로는 '동정'이라 옮겨져 왔지만 실은 그것보다 큰 개념인 심퍼시 sympathy, 동갑에 대한 책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1장 4절)에서 그는 주장한다. 쇼펜하우 어식의 동정은 고통의 보편성을 인식하면서 나와 너의 경계가 허 물어지는 사건인데, 이는 고통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흔한 말이 무색하게도 고통의 양이 두 배가 되는 결과에 이를 뿐이며,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pp.95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진실이다. 그러나 나의 진실은 아니다. 사 랑은 세상이 고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 기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사랑은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 나의 진실은 다음 문장에 있다. "Amo: Volo ut sis."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에 적힌 아우구스 티누스의 말, 훗날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 (9장 2절)에서 다 시 적은 그 말.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 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 다. '너는 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모 볼로 우트 시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내자고, 서로를 살 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 pp.96
이런 맥락에서 나는 사랑과 동정이 깊은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 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요소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 한 동정이라면 말이다. p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