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만나기 싫어 딸네 집에 방 한 칸을 차지 하고 숨어 있어도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었다. 혼자 있으면 하늘이 부끄럽고 땅이 부끄러웠다. 차라리 하느님과 정면대결 을 하려고 수녀원에 들어가 독방 차지를 하고 있어도 보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도 해보고,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달라고 처절하게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 pp.35
그걸 뭐라고 해야 할 까. 행복감이라고 해야 할까,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황홀경이었다. 파바로티의 기름진 고음이 절정에 달했을 때 목놓아 울고 싶은 격정에 사로잡혔다. 내 무감각을 울린 건 그 러나 파바로티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pp.39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 찾는 아 래층에 안전하게 발을 디디자 비로소 고래 뱃속을 빠져나왔구 나, 하는 현실감이 왔다. 이번 여행길을 통틀어 방금 내린 비 행기까지가 다 고래 뱃속의 일로 여겨졌다. 어쩌면 지난 이십 년 동안의 설렘도 목적도 없는 여행이 다 고래 뱃속 안에서의 헤맴이 아니었을까. pp.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