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 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이었을 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 고, 위로가 되었다. pp.32
세상도 나도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전쟁이 할퀴 고간 상처를 다독이고 가난을 딛고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사 람들은 과거를 잊고 현실에만 충실했다. 6·25 때 얘기만 나오 면 아이들까지도 궁상떨지 말라고 핀잔을 줄 정도로 잊고 싶 은 과거가 된 지 오래였다. pp.32
내가 누려온 안일이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졌다.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pp.32-33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 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 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훗날 나타난 통 계숫자만 봐도 그렇다.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 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 었다. pp.33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 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 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pp.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