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1969년 겨울, 나는 조그만 좌식 책상 앞에 앉아서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우고 있었다. 동 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마침내 목 록을 다 지운 나는 내 가운뎃손가락 마디에 연필 쥔 자국이 깊게 파인 것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인간 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이다. 요즘도 뭔가를 쓰다가 이따금 연필을 내려놓고 가운뎃손가 락 마디의 옹이를 한참 내려다보곤 한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 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pp.13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 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더구나 그 삶은 내 가 빨리 존재의 불리함을 깨닫고 거기에 대비해주기를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 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 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p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