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죽음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다. 자신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수용이자 ("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수용이었다. (전자책 기준 92%)
질병은 자연이 우리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가며 죽음에 대비시키는 방법이다. 이빨이 고통 없이 저절로 빠지듯 우리도 서서히 사라진다. 건강하던 몸에서 죽은 몸이 되는 것은 견디기 괴로운 일이지만, "고통스러운 삶에서 죽음으로의 변화는 그리 잔인하지 않다." 몽테뉴는 말한다. (전자책 기준 92%)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면 삶을 더 풍성하게 살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축제가 한창일 때 해골을 날라 와서 손님들에게 자기 운명을 상기시켰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도 이 사실을 알았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전자책 기준 92%)
하지만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식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그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 (전자책 기준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