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닛은 열한 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닛'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햄닛의 죽음을 맞이한 4년 후, 셰익스피어는 죽은 아들의 이름을 빌려온 연극 <햄릿>을 발표한다. 이 먹먹한 소설은 한 아이가 겪은 죽음으로부터의 사투가 어떻게 한 가족의 삶을 뒤흔드는지, 그리고 각자 이를 어떻게 애도하고 '뚫고 나가고자' 하는지를 담담하게, 마치 울음을 꾹 눌러 참는 것 같은 문체로 서술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젊은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아버지(그의 이름 역시 햄릿이다)의 혼령을 발견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복수를 해 줄 것을 청하면서 극이 시작된다. 반면 매기 오패럴의 <햄닛>은 아그네스와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닛'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삶의 주도권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화자이자 햄닛의 어머니 아그네스에게 햄닛은 뜻밖의 존재가 된다. 아그네스는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생'을 선택하여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첫 아이인 수재나의 출산을 집 밖에서 홀로 견뎌낸 아그네스는 쌍둥이를 집 안에서 낳아야만 했고, 쌍둥이 누나인 주디스의 출산을 마무리했다고 여겼을 때 햄닛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한다. 두꺼비를 질색하던 아그네스는 햄닛의 생존을 위해 모든 민간요법에 매달린다. 그리고 역병이 돌아 죽어가는 주디스를 살려내는 데 성공한 아그네스는 쌍둥이 누나와 함께 누워 병이 옮아버린 햄닛은 미처 살려내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된다.
'아그네스'와 '그(셰익스피어라 칭하겠다)'는 애도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 두 사람에게는 모두 가정을 책임지고 꾸려나가야 할 의무가 있으나, 아그네스는 집에 머물러 아이들과 남은 햄닛의 흔적을 돌보는 방식을 취하는 반면, 셰익스피어는 가정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커리어와 극단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가야만 한다. 아니, 떠나가기를 선택한다. 대문호가 된 셰익스피어는 성공을 거두고 집에 부를 가져다주나, 아그네스는 아들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셰익스피어를 원망하고, 그의 '런던으로의 도피'를 아그네스는 경멸한다. 단적으로, 셰익스피어의 가족은 그의 성공으로 커다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나, 오히려 아그네스가 '숨을 쉴 수 있는 장소'는 집 안이 아닌 뒷마당이다. 소설의 화자인 아그네스에게 이와 같은 태도는 '외면'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나를 잊지 마.
하지만, 맨 마지막 챕터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관람하는 아그네스는 셰익스피어의 애도를 홀로 '알아차리게' 된다. 주인공인 왕자 '햄릿'은 '햄닛'의 버릇(아직 어린아이의 햄닛의 버릇은 가족이 아니면 그토록 자세히 알 수 없을 것이다)과 외양을 꼭 빼닮은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다. 무대 위에서 '햄닛'은 자라서 어엿한 청년이 된다. 반면, '햄닛'의 아버지인 선대 왕, 즉 셰익스피어를 투영한 '유령'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존재가 된다. <햄닛>에서 셰익스피어는 한순간이나마 유령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 어린 아들을 되살리고자 간절히 소망한다. 아그네스는 그 장면을 목격한 뒤에서야 셰익스피어의 애도를 목격하고 이해하게 된다. 유령은 '햄닛'을 대신해 청한다. '자신과 자신의 죽음을 잊지 말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