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그니스가 바라는 건 숲의 푸른색뿐이다. 땅바닥에서 어룽거리며 흔들리는 빛의 패턴, 잎이 만든 지붕의 자비로운 그늘, 적막이 아닌 고요, 호젓한 작은 땅을 둘러싸고 저 멀리 끝없이 뻗은 나무들. 애그니스는 숲까지 갈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시간이 없다. 이 집에는 문이 너무 많다. (전자책 기준 63%)
애그니스는 이 목소리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듣는다. 애그니스의 생각은 이제 짧게 다듬어지고 바싹 깎여 뼈다귀만 남았다. 남편,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장갑 배우. 구슬, 극장, 질투심 많은 공작. 죽음. 따스하게 기억해주길. 애그니스는 깨닫는다. 그 생각을 말로 형성하지는 못하지만 느낌을 받는다. 편지에서 느껴진 남편은 달라진 게 아니라 돌아온 것임을, 본모습으로, 회복되었다. 좋아졌다. 돌아왔다. (전자책 기준 64%)
오래전부터 애그니스가 생각한 죽음의 개념은, 드넓은 황무지 한가운데 불이 켜진 작은 방의 모습으로 떠올랐다. 산 사람들은 방안에서 산다. 죽은 사람들은 건물 밖에 모여 들어 손바닥과 얼굴과 손끝을 창문에 대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자기 식구들한테 가닿으려고 절박하게 매달린다. 방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바깥에 있는 이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벽을 통해 얘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그러지 못한다. (전자책 기준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