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렉 이건이라는 작가를 몰랐고, 그의 작품도 처음 접하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번 독파가 SF 시리즈였기에 그 중에서 한 편만 골라서 읽을 계획이었는데 '생을 뒤흔들 강렬한 SF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문구에 이끌렸다.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이 작품집에는 총 11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번역자가 선별한 작품들일 듯한데 대체로는 1990년대 초중반에 쓰인 작품들이다.
첫번째 작품에서부터 충격을 받았다. 우선 소재에서부터 충격적이었고, 그 묘사와 서술이 충격적이었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설득적이었다. 마치 가능할 것도 같은 생각이 들정도로. 그것이 하드 SF 장르가 갖는 재미이자 또 독이다.
하드 SF라는 장르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집을 보니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 것 같다. 또 최근 읽고 있는 테드창의 작품과 비교되는 이유도 알겠다.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아 진도가 더뎠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 열 한편의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뒤로 갈수록 충격의 여파는 덜했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지식이 놀라웟다. 그중 가장 놀랍고 재밌었던 작품은 <루미너스>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 중에 단연 최고이고, 어떻게 그런 발칙한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싶었다. 이것이야 말로 수학과 과학에 대한 신성모독 수준을 넘어선 것이 아닌가.
그러한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수학 전공이고,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며 의학관련 연구소에서 일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 첨단기술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겠지. 하지만 1990년대 초중반은 아직은 기술들이 설익었고, 또 두려움의 대상도 있었다. 당시 확산되기 시작한 에이즈도 작품들 속에 그런 대상으로 등장하고.
작품들 속에서는 미래를 가정으로 쓰였지만 그 미래마저 현재 기준에서 보면 과거가 된 시점이고, 작가의 시대의 기술을 그대로 외삽하다보니 이후의 과학기술은 현재의 기술수준에 비해 저평가된 모습마저 보인다. 또는 다소 허황돼 보이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마저도 추억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사실 나는 SF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설정들에 질리기도 하고, 낯간지러운 표현들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학, 과학, 의학을 전공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차라리 만화처럼 순수하거나 아니면 정말 뻔뻔해 보일지언정 하드SF를 구사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애매한 SF는 견디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렉 이건의 작품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하드 SF 장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다.
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것이 거의 없어서 (그나마 나왔던 작품도 구하기 어려우니) 이 작품집이 거의 유일할 것 같은데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특히, 그의 최근작들은 어떨지 궁금하고, 장편들은 또 어떨까 싶다. 그의 작품들이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