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묘지를 읽고 제목을 따왔다는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었다. 마지막 외침이 반전의 펀치일지, KO패의 비명일지 읽으면 혹시 알 수 있으려나,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예감은 부정의 방향으로 흐르나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세 친구들은 살 날이 더 많은데 한오가 모두의 마지막이어서는 안되지 않나.
수상집과 교차로 읽은 책이 있다.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단어의 집>을 읽다 ‘빈야드’란 낱말을 만났다. 카미노 길을 걸을 때 만났던 여름의 포도밭은 끝이 없고 알맹이는 시큼 달달했었다. 한마디로 생명력이 넘쳤다. 비록 현재 한없이 검고 죽음의 냄새를 풍기더라도 그 시원은 따뜻했다고 말하는 문장들이 있어서 위로가 됐다.
‘짓밟고 망가뜨릴 심산으로 포도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정성과 사랑으로, 기도로 길러진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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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야드’는 와인 영어로 포도밭, 포도원을 뜻한다. 한 존재의 기원이자 시작점, 최초의 우물일 그곳. 다시 돌아갈 방법은 전무하지만 이따금 그곳을 떠올리면 영혼이 지친 몸을 누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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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생각될 때에도 당신과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끝끝내 반짝이는 세계, 당신의 빈야드가.’
- 단어의 집, 안희연, p.125~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