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의도적으로 존재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자신이 이렇다고 생각해오던 존재가 더이상 그와 같은 존재가 아니며, 자신과 사회 안의 타자들에 대해 갖고 있던 견해는 찢겨나가고, 우리의 위치 및 우리의 취향 등, 외관상 가장 평범해 보이는 삶의 일들이 작동할 때 그 무엇도 더는 자연스럽지 않고 당연하지 않다. 자신의 출신이 조금이라도 피지배 계층과 관련있는 경우, 부르디외의 철저한 분석에 대한 지적 동의에 덧붙여 체험된 자명성을, 이를테면 경험이 보장하는 이론의 진실성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과 지친이 몸소 상징적 폭력을 당한 경우 그것이 실재함을 부인할 수 없으니까.
사르트르의 경우, 그의 죽음으로 뭔가가 마무리되고 통합되고 그의 사유가 더는 힘차게 움직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저물어가리라는 느낌이 들었던 반면, 피에르 부르디외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를 잃고 슬픔에 겨운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이렇게나 많듯이-내가 우리라고 말하는 경우가 몹시 드물지만 이번만은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퍼져나갔던 우애의 감정을 고려하여 '우리'라고 감히 말하련다-그의 참신한 사유와 개념들과 저서가 미치는 영향이 계속해서 확장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 가운데 그만큼 많다. 가난한 자들이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글을 쓴다고 당대에 책망받았던, 누구로부터였는지 더는 기억나지 않지만, 장자크 루소의 경우가 그랬듯이 말이다.
<슬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