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일시적인 일탈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방에는 수백 권의 책이 남아 있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 이야기들 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다. 책이 나를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녔다. 집으로 갈 때면 아쉬움에 입이 말랐다.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면서도 밤에 남편과 침대에 누워서도 작업실의 빈 공간을 떠올렸다.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pp.154
호기롭게 대안을 떠올리면서도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공상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 캘리그래피를 할 수 없었다. 그 일의 핵심인 균형감각-글씨의 크기와 모양을 조율하고 전체를 하나의 그림처럼 구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먹을 갈고 붓끝을 세우고, 글자들의 미세한 기울기를 맞추는 일련의 과정이 더이상 내게 만족을 주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 가는 것, 그곳에서 느린 속도로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p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