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이 넋 나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오대표의 옆얼굴을 살피다 문득 몸이 굳었다. 오대표의 얼굴에 잔을 잃은 서운함이나 원망 대신 묘한 만족감이라 할까 승리감이 얼핏 스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마치 오늘 파티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는, 이만하면 괜찮은 계산서가 나왔다는 표정을 지은 까닭이었다. 성민의 표현대로라면 오대표는 '계산이 정확하신 분'인데, 그렇다면 저 미소는 대체 무슨 뜻일까?' 그제야 이연은 오늘 가장 말수가 적은 서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 대개 '걱정'과 '근황'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다 해도 이연은 가능한 한 이 연극을 이대로 마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pp.121-122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 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뭔가 주고 싶다면 그에게서 먼저 그걸 빼앗으라'는 법칙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지금도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면, 사랑이나 어떤 성취 혹은 명예 앞에서 너무 벅찬 감정을 표할 때면 어김없이 '저 사람 곧 저걸 잃어버리겠구나' 예감하곤 했다. pp.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