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른 잎사귀가 떨어져 있는 포도밭을 말없이 걸었다. 수분이 다 빠져나간 채 시커멓게 쪼그라든 포도송이가 종종 눈에 띄었다. 곳곳에 버려진 비닐 무더기를 보자 고등학교 교실에 두고 온 방석이 생각났다. 솜이 다 꺼진 그 방석은 누가 버렸을까.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 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pp.34
"아무도 죽지 마."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수영이었나, 윤주였나. 뒤를 돌아 봤지만 두 사람은 죽은 가지들 사이에 가만히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pp.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