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오는 힘에 부치도록 바쁘고 긴장한 채로 지냈다. 매사 최선을 다해도 줄곧 야박한 평가를 받아온 사람 특유의 조바심과 자괴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기였던 펜글씨는 다양한 컴퓨터 서체로 대체되면서 무용해졌고, 여신 업무를 배울 새 없이 신입 사원 시절을 보낸 터라 연차에 비해 업무 능력이 뒤처진다는 소리를 들었다. 대학에 맡긴 미래의 삶은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피로감만 남기고 쉽게 폐기되었다. 한오는 성실한 사람답게 자신이 그런 삶을 원한다고 여겼다. 열렬히 열망한 일이어서 견디는 것 이라고. 아무리 힘들어도 은행을 그만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일에는 다음이 있지만 사직서를 낸 고졸 행원에게는 그런 게 없기 때문이었다. 성실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최악의 노동자가 되기 십상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pp.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