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의 종류는 다양하다. 빨리 지나가는 것도 있고, 뒤늦게 절름절름 찾아오는 것도 있다. 권태를 잘 다루면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뿐더러 날마다 내 재산이 된다. 러시아인 마을에는 사시사철 여윈 달의 권태가 있다. 달의 목은 오이꽃이 되거나 잿빛 밸브가 달린 트럼펫이 된다. 며칠 후면 벽에 걸어둔 챙모자 같은 반달이 된다. 시간이 더 지나면 터질 듯 차오른 둥근 달이 하늘에서 권태롭게 내려다본다. pp.228
권태는 불안을 견디는 것이다. 권태가 작정하고 내게 다가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권태는 그저 가끔 내가 잘 지내는지 알고 싶어할 뿐이다. p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