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읽었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다시 읽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이 소설이 생각나곤 했었는데, 마침 북클럽에서 이 소설을 발견하고 독서 챌린지를 시작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듯 느낄 때가 있다.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알 수 있고, 아니 이미 알고 있는 상태일 것이라고 가정할 때가 많은 까닭이다. 물론 엄청난 착각이다. 지금 나는 메이크업을 한 상태의 인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민낯을 보고 싶다면? 이 소설을 읽으면 된다.
모두가 눈이 먼 상태란 너무 터무니없는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코로나19를 생각해 보라. 모두가 입과 코를 가리고 생활해야했고, 병에 걸리면 격리해야했고, 언제 이 아수라장이 끝날지 몰라 암울했던 그 시절을. 어쨌든 사라마구의 소설 설정은 인간의 민낯을 보기에 가장 적절한 설정이다. 누구도 볼 수 없다.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 예외는 없다. 결국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명과 기술이란 볼 수 있다는 이점을 전제하고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이 전제가 깨지는 순간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알게 한다. 사라마구는 인간이 당연하게 누리던 단 하나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인간성의 본질을 담대하게 드러낸다.
이 쯤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모두가 볼 수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소설을 다시 읽고 나서야 나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내가 너무 쉽게 단정짓고 결론내렸다고 반성했다. 10여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이었다. 그리고 10여년 후 이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편견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다른 동식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 결국 인간이 다른 생명들과 평등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었던 그 모든 기능들은 스스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는 것이 내 오만과 편견을 깨뜨리는 출발점이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지배자처럼 여기며 군림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
사라마구는 인간 사회의 딜레마가 해결될 수 있느냐 또는 해결될 수 없느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 또는 기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애당초 생명의 시작과 끝이 불가해한 미스터리인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지 않기를. 애초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태어난 것부터가 당연한 것이 아니었듯이 말이다. 앞으로의 내 삶도, 앞으로의 내 죽음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가 진정 눈 뜬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자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이 소설을 다시 읽은 가치가 넘치도록 크다.
결국 내가 알지 못하는 생명의 신비 앞에서 고개 숙일 수 있는 겸손에 내가 바꿀 수 있는 여지를 찾아 움직이는 노력을 더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