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가만히 앉아 생각해보니 물을 내려보내지 못하는 하수구가 내 모습 같기도 하더라. 매일 매일 별일 없이 지나가는 것 같은데, 사실 채 소화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조금씩 쌓이다가 탈이 나버린 거지. 그것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pp.82-83
요즘은 전봇대에 묶여 있는 풍선이 된 것 같아.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맴돌며, 날이 좋으면 좋아서 슬프고 안 좋으면 안 좋아서 슬픈 그런 상태. 다양한 이유로 마음이 좀 어두워진 탓도 있을 테고 어딘가를 여행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그럴 만하다 싶으면서도 유독 나만 이런가 싶어서 참 답답하네. pp.83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예쁜 바다를 발견한 것처럼 신나게 수영하고 물싸움도 하면서 재밌게 놀았어. 가끔은 깊은 곳까지 헤엄쳐갔다가 다리가 닿지 않아 깜짝 놀라서 다시 허겁지겁 돌아오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래도 그것조차 재밌다고 깔깔거리며 웃고 그랬지. 신기한 것도 참 많았고.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생각지도 못했던 긴 썰물의 시간이 시작되더라.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이 드러나고 어느새 발은 갯벌에 빠져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려 워졌어. 몸과 마음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무거워진 거야. 한번 빠지니 정말 빠른 속도로 가라앉더라.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싶은 무서운 순간들도 생 기고. pp.84
버거운 시간을 보내며 조금 괜찮아질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찾았어. 혹시 너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 한 번 써볼게.
첫번째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하고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
그리고 두번째, 인정하고 포기했다면 시간이 흘러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
주의할 점은 내버려두더라도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두 눈을 뜨고 정확히 바라봐야 한다는 거야. 포기했다고 외면해버리면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헤쳐 나갈 방법을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하거든.
그리고 세번째, 고민거리들에 줄을 달아 풍선처럼 띄워두고 산책을 하는 것. 산책하며 하늘과 나무, 산책 나온 강아지들,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기되더라. 자연이 주는 힘은 대단하잖아. 그렇게 잠깐이라도 걷다보면 고민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오기도 하니, 꼭 한번 가벼운 산책을 즐겨봤으면 좋겠어. pp.85-86
내 마음을 고장내지 않고 오래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소화를 잘 시켜야겠다고, 싱크대 하수구를 보고 배운다. pp.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