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는 한국통감으로 부임한 후 서울의 여러 공공건물에 시계를 설치했다. 건물 정면에 대형 시계를 붙였고, 집무실과 회의 실마다 벽시계를 걸었다. 통감부에 모이는 조선의 대신들은 벽시계 아래서 통감의 시정연설을 들었다. 이토는 시간이 제국의 공적 재산이라는 인식을 조선 사대부들에게 심어 넣으려 했으나, 시간의 공공성을 이해시킬 길이 없었다. 이토 자신이 설명의 언어를 갖추지 못하기도 했지만 시간을 계량하고 시간을 사적 내밀성의 영역에서 끌어내 공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문명개화의 입구라고 설명을 해도 고루한 조선의 고관들은 알아 듣지 못할 것이었다. pp.13
러시아를 도모할 때까지도 이토는 그것이 도장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후 조선 사대부들과 자주 상종할수록 이토의 뜻은 도장 쪽으로 기울었다. 왕권의 지근거리에서 세습되는 복락을 누린 자들일수록 왕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갈 때는 새롭게 다가오는 권력에 빌붙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토는 점차 알게 되었다. 도장의 힘은 거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도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살육을 피할 수 있고, 조선에서 밀려나는 서양 여러 나라들의 간섭을 막을 수 있고, 사후 처리가 원만할 것이었다.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도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도장의 힘은 작동되고 있었으나, 조약 체결을 공포한 후 분노하는 조선 민심의 폭발을 이토는 예상하지 못했다. pp.17
수백 년 동안의 수탈과 억압으로 검불처럼 무기력해 보이던 조선 백성들이 무너진 왕조의 부흥을 외치며 그토록 가열하게 봉기하는 사태가 이토는 두려웠다.
조선이 문명개화되면 이 거친 백성들의 들뜸은 스스로 잦아들어 제국에 동화될 테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소요가 풍토 병으로 눌어붙으면 조선 병합 정책은 순조롭지 못할 것이었다. 무리가 되더라도 빨리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이토는 판단했다. 그의 결정은 단호했고 돌이킬 수 없었다. pp.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