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작이 한 남자의 거짓된 삶과 그 삶보다 더욱 거짓 같은 죽음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관계란 참 농담 같은 것이기도 했다. 한영은 어떨까. 내 모든 진실을 알고도 내 곁에 남아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미래를 걱정 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내 유일한 삶의 방식이니까. pp.223
모든 게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누군가의 탓을 하는 시대에 나는 누구를,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몰랐다. 하루에 십수 명이 확진될 땐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야단하며 확진자 동선을 낱낱이 공개하고 술집 영업을 제한하더니 이제는 하루에 몇십만 명이 걸려도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는 정부를? 이태원 상권이 싸그리 몰락한 이 판국에도 단 한 푼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임대료를 받아 챙기는 건물주를? 아니면 딱 요맘때 이태원을 헤집었던, 기남시 55번 환자를? 최초로 한국에 이 병을 들여온 사람을? 아니면 어머니가 그토록 믿는 신을 탓해야 하나? 아무것도 믿지 않는 나는 도통 무엇을 탓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나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로, 이 모든 것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나 자신을 비난하기로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pp.225
"형, 내가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뭘 배웠는지 알아? 사람이란 어떻게 해서든 먹고살아진다는 거. 시든 양상추를 씹어 먹고도, 흙을 파먹고도 살아지는 게 인생이야. 실패를 너무 겁내지 말고 그냥 깨끗이 정리하면 안 돼?" p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