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스무 번]
"조금 더 기다리면 하늘에 희미하게 달이 떠올랐다. 운좋게 둥근달을 보는 날이면 옥수수밭에 숨어서 이렇게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싶어졌다.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 눈물을 참으려고 손을 더듬어 옥수수를 다섯 개 땄다." _p.28_
ℹ 위 보름달 장면은 폴 볼스의 소설 <더 셸터링 스카이> 속 문장을 변형 한 것.
✍ 누가 약자일지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수면제를 먹고 하루를 조용히 보내는 장인일까,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고 그 이유를 모르며 두 번 다시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된 나 일까, 장인과 나를 돌보고 있는 아내일까, 협박을 해서까지 CCTV를 팔고있는 보안 업체 직원들일까, 옥황상제를 믿고있는 그 신도들일까...
✍ 약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각각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호텔 창문]
"자라면서 운오는 누구 덕에 살아났는지 자주 상기했다. 큰어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말했다. 너는 참 복이 많구나. (...) 큰어머니는 자주 형의 이름으로 운오를 불렀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들뜨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오래전에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만 누리는 이런 무덤덤함을 큰어머니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_p.50-51_
✍ 자신도 미쳐 깨닫지 못하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그것에 가슴이 아파왔다.
[홀리데이 홈]
"아이는 일 년 전 어학연수를 떠났고 연수 종료 후 그곳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다. "엄마, 여긴 달라요." 아들은 그렇게만 말했다. 장소령은 알아듣고 이진수에게 "거긴 좋대"하고 바꿔 말했다." _p.71_
✍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다름이 존재하고 그 다름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편한대로 해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상대에 맞추어서 해석을 해 주어도 어차피 듣는 사람은 듣고 싶은대로만 듣고 자기가 살고 싶은데로 살아갈 것이다.
[ 리코더]
"간혹은 모든 책임을 그 사건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어리석은 결정, 잘못한 일, 망쳐버린 관계와 실패한 자금 운용 따위를 모두 탓할 수도 있었다. 한때 무영은 그렇게 했다. 자신이 여전히 어두운 강당을 배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그날로 돌아갔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 천천히 고요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겪은 적이 있었다. 붕괴가 끝난 후 잠시 어둠을 마주했던 먹먹한 시간. "수오니?"" _p.113_
[플리즈 콜 미]
"술은 미조가 온종일 잠을 자든 소리 죽여 울든 내버려두었다. 오히려 잠을 자도록 도왔고 마음껏 울도록 도와주었다. 미조에게 그렇게 해주는 건 술이 유일했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느긋하고 애틋하게 지난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순간이 짧다는 게 문제였지만." _p.121_
[후견]
"그거 범죄다. 네 신원을 도용했잖니. 변호사 말이 명예훼손도 걸 수 있다더라. 걱정 말아라. 입양아한테 고향의 정을 느끼게 해줘서 나쁠 건 없지. 어미한테 버림받았지만 고향은 버리지 않았고 누군가 도우려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사람은 온정을 경험해야 제대로 인간이 된다." _p.165_
[좋은 날이 되었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머니의 과거에서 쓸모 있다 여겨지는 것들로 어머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관둘 것이고, 결국에는 어머니를 미워하고 알 수없는 대상에게 화를 낼 것이고, 이내 모두 포기하고 싶어질 것이다. (...) 나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다. 어머니와 나에게 적절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얼마간 안심이 되는 말을 생각해내고 싶었다. 애를 썼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_p.196_
[미래의 끝]
"어떤 더한 일이 생겨야 엄마가 아줌마를 찾을지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 생기기를 바랐고 더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다시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아줌마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시련이 닥치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 도움이 필요치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서 말이다." _p.224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