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의 가족 역할극에서 딸은 의무만 잔뜩 부과된 배역이었다. 그러니까 아빠의 그 말은 자신에게 자주 연락을 하고 또 이렇게 가끔 밥도 같이 먹자는 뜻이었다. 이런저런 잡무가 생기면 나나 영지에게 처리를 부탁하겠다는 뜻이었다. 무보수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빠의 그 말은 인생의 기로에서 사사건건 간섭을 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간섭은 나의 바람이나 욕망과는 상관없이 아빠의 체면에 좌우되게 마련일 것이다. pp.237
"저는요, 소문내고 싶어요. 점심으로 맛있는 우동을 먹어도 소문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잖아요. 길 가다 귀여운 고양이를 만나도 소문을 내는 게 인지상정이라고요. 근데 우리 은호 좀 보세요. 얼마나 귀여워요. 아버님도 거기 앉아서 계속 본인 자랑만 하셨잖아요. 뭐 별 대단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저도 동네방네 소문내고 자랑하고 싶어요. 동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잔치라도 열었으면 한다고요. 다들 그렇게 하면서 살잖아요. 근데 저희가 남들은 다 하는 그 잔치 열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어디 광고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거짓말 안 하고 살겠다는 거예요."
나는 거짓말 안 하고 사는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진실되게 사는 대가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부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p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