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게 무언가 숨기고 싶은 게 있을 때면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본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는 것이 오랜 정설이니까 그 행위를 해냄으로써 나를 변호하는 것이다. 나는 내 좌표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찍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늘 애매모호한 사람이 되어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큰 것을 무화시키는 작은 이름들. pp.112
그 일은 반복되었다. 나는 원진과 만날 때마다 취했고 취할 때마다 추태를 부렸고 원진은 그때마다 자길 좋아하냐고 물었다. 이상하게도 그 일이 거듭될수록 부끄러움은 점 점 옅어졌다. 맨 처음에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아주 선명했다. 하지만 점점 희석되었다. 열화되었다. 그런데 때로는 그 부끄러움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와 아주 선명해질 때가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원진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곤란하다고 여기며 원진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순전히 내 감정의 편의를 위해서. 그것은 아주 유아적이고 치졸한 생각이라서 나중에는 그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낮이 뜨거워졌다. p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