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는 내내 처절하고 집요하게 묘사되는 눈내리는 풍경에 압도되었다. 이제 눈이 내리면 나는 아름다움보다는 다른 감정을 느낄 것이다. 고통스러운 사랑의 결정체.
경하와 인선 그리고 정심의 사랑은 저미는 고통 없이는 실현되지 못한다. 그 고통을 묘사하는 대목마다 너무 처절하여 문장을 읽어나가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흡사 내가 그 통증을 같이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록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경하처럼 나도 이 학살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강작가는 사력을 다해 독자를 그곳으로 이끌어간다. 죽은이를, 진실을 기억함으로써 작별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인선의 그것처럼
성대를 울리지 않으며 속삭이듯이 그러나 단호하게 들려온다.
p.285 그걸 펼치고 싶지 않다. 어떤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다. 그 페이지들을 건너가라고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복종할 의무가 나에게 없다.
p.303 대답을 망설이며 나는 서 있었다.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적 속에 더 머물고 싶지도 않았다.
p.311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