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가장 널린 애정 소설이라는 '숙향전. 숙영낭자전'.
특히 숙향전은 한문으로 쓰인 판본도 있으며 배비장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봉산탈춤 그리고 사설시조에도
숙향전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있다고 한다.
숙향전은 길이가 꽤 긴데, 숙향이라는 한 인물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그런데 그 일생이라는 것이 숙향으로 사는 지금의 생만이 아닌 월궁항아였던 전생까지를 포함한다.
숙향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하고 어디 한 군데 모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인물로,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그야말로 전형적인 영웅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력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임에도 남성이 아닌 여성이 그런 캐릭터라는 것이 조금 신기할 뿐이다.
숙향으로서의 지금의 생은 전생인 월궁항아였던 시절과 맞물려 있는 것 같은데,
숙향이 그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금 의아하다.
월궁항아였던 시절에 큰 잘못을 저질러서 지상으로 귀향 온 것으로 묘사되는데,
천상에서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 지상에서는 저렇게 완벽하게 처신할 수가 있나 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녀의 삶은 어디에서 태어나느냐에서부터 몇 살에 어떻게 죽느냐까지
다 정해져 있다는 것을 여러군데에서 암시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숙향이 넘긴다는 여러 번의 죽을 고비가 막상 눈앞에 다가와도 전혀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
이 고비에서 당연히 살아남아 이선과 만나고 70살까지 살다 다시 천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런 고비마다 마고할미, 용녀, 화덕진군들이 나서서 돕는다.
사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과연 귀향을 온 것이 맞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이 소설은 쓰였던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과는 달리 굉장히 혁신적인 소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시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무리 양반의 지위를 사고 팔기도 했다는 조선 후기라고는 해도 당시 사회는 엄연한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의 재산 취급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히 용납되던 사회에서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아에, 술집을 하는 마고 할머니네 가게에서 수를 놓던 여자였던 숙향이
양반집 아들과 정식으로 혼인을 하게 하려면 전생에 월궁항아였던 배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양반집 남자가 미모가 아름다운, 그러나 신분이 낮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도
정식 혼인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춘향전만 해도 춘향이가 목숨을 건 열녀라는 조건이 붙고 나서야 이몽룡과 혼인하게 되지 않는가.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어사가 되고서도 춘향이의 마음을 시험해보려고 하는 모습이 굉장히 불만이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당시의 여러 제약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굉장히 파격적으로 다가왔을 거라 생각된다.
그로 인해 당신의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마음 한 켠에 통쾌함마저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런 건 요즘에도 볼 수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가난하지만 밝고 바른 여자와
재벌 2세의 만남을 다루는 수많은 드라마들이 그렇다.
지금의 사람들이 그런 드라마를 즐겨보는 느낌으로 당시 사람들은 숙향전을 즐겨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에 비해 숙영낭자전은 분량도 짧지만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모든 것이 다 잘 풀려나갔던 숙향과는 달리 숙영은 비록 그 끝은 괜찮았다 하지만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이다.
설마설마하다가 큰 충격을 받았는데, 도무지 숙영의 시아버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숙영낭자전을 다 읽고 이상구 박사의 해설을 읽고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내 머릿속엔 그 개념이 거의 없는 신분사회라는 것을 대입해야 숙영의 시아버지가 한 행동들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숙영은 숙향보다도 더 상황이 좋지 않다.
숙향은 비록 어려서 헤어졌지만 양반 부모가 있었지만,
숙영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완전히 내려왔던 것이 아니라 중간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옥연동에 머물고 있었다.
지상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신분을 정해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시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아들이 사랑해서 데리고 왔을 뿐
숙영은 신분이라는 것 자체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마침 시아버지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을 위한 좋은 혼례처를 찾고 있었고 말이다.
그 과정은 정말 좋지 않았지만 숙영부부 역시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던 숙영이 시부모를 찾아와서
당신들의 죄가 아니라 내 전생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당신들도 결국은 극락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많이 당황스럽다.
그만큼 그 시부모의 행동이 당시로서는 용납 가능한 수준이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은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기준을 따르게 마련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들은 당시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기준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소설을 읽을 때는 전혀 몰랐지만 해설까지 읽고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여러 소설들도 후대의 사람이 본 다면 이런 느낌일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