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은 그 청년에게는 물론 내게도 엄청난 양의 절망의 피를 흘리도록 강요했던 한 해였다.(...)
그 옛날의 고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나는 그 글씨들이 보이지 않도록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앞표지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표지 위에도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고통의 자취가 또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검은 색연필로 쓰인 1212라는 숫자였다.
13년의 세월에 그 검은색은 많이 지워져 있었지만 내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 내 기억이 아주 정확하다고 맹세할 수는 없지만, 1212라는 숫자, 그것은 그 청년의 죄수번호였다. 역시 '양철북'은 나로서는 못 읽을 책이라고 생각하며 후닥닥 일어나 책을 본래의 자리에 보이지 않게 처박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