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는 다르게 영초언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인 서명숙님을 중심으로 서술된 여러 여학생들의 학생민주화운동 이야기이다. 영초언니는 저자에게 사회적 모순을 일깨워주는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명숙은 어렸을 때엔 박정희를 존경하던 '박정희 키드'였다. 하지만 고려대학교에 진학하며 유무형의 제약과 검열을 직접 경험하고, 감시와 통제, 그리고 주변의 지인들이 학내 시위 문제로 잡혀들어가는 것을 직접 보게 됨으로써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남학생 위주의 학교였던 고대에서 여학생들은 끊임없이 성희롱, 성차별을 겪게 되고, 거기에 대한 저항과 문제제기가 혼자서 행동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자 여학생들의 모임인 '가라열'을 조직하여 여러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로동에서 야학교사를 하면서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처우를 알게되고('동일방직 노동자투쟁', '동일방직 똥물 사건'), 6월 세종문화회관의 데모를 시작으로 독재체제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여러 시위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비밀리에 연행되면서 갖가지 고문에 시달리게 된다. ('산천초목'사건)
명숙은 고문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자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것도 감시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도권 신문 방송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인권 문제를 제기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천영초, 박종원, 서명숙 등 사라진 여학생들의 소재를 밝히라'는 성명을 내놓자 31일만에 밀실에서 풀려나지만 '긴금조치 9호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구치소에 수감되게 된다.
혜자언니가 데모로 전경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에서 울분과 분노가 느껴졌고 첫 공판에 참석하러 가면서 영초언니가 수갑과 포승줄에 묶여 있음에도 당당하게 "독재정권 물러가라! 민주주의 쟁취하자!"라는 말을 큰소리로 외쳤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 것일까.
그러다 구치소에서 듣게 된 박정희의 사망 소식과 갑작스럽게 결정된 출소로 셋은 세상과 격리된 지 236일 만에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된다.
박정희가 사망했음에도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얼마 뒤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5.18 광주민중항쟁'을 제압한 전두환 정권이 본격적으로 공포정치를 이어가게 된다.
명숙은 운동권에서 멀어지기로 했지만 영초언니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등사, 배포하며 민주화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찰에 쫓기던 영초언니가 명숙에게 몸을 잠시 의탁하고 떠나자마자 들이닥친 경찰로 인해 명숙은 공포를 느끼며 영초언니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
몇 년 만에 만난 영초언니는 사회를 바꾸겠다는 열망을 포기하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이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당하자 캐나다로의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캐나다에서 걸려온 전화에서 영초언니는 명숙에게 행복하다고 얘기하지만 일주일 후 영초언니는 큰 교통사고로 두 눈의 실명과 서너 살 정도의 지능 수준이 되고 만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아래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받기도 하고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목숨걸고 싸웠음에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그녀들은 얼마나 암담하고 비참했을까. 세상에게 배신당한 느낌일거 같다.
2013년 3월 3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만장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리자 긴급조치 사범으로 구속되어 실형을 언도받았던 많은 이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혜자언니 역시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긴급조치 9호 위반과 병합된 '특수폭행죄'에 대해서는 유죄를 받았다. 2심 재판에서 혜자언니가 통렬한 최후진술을 하는 부분에서는 나역시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우리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독재정권과 민주화운동을 여성운동가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서 더욱더 의미가 있었다. 그들이 이룩한 갚진 민주주의는 지금 또다시 큰 변화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또다시 국민들이 민주화운동이나 촛불을 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떻게 쟁취한 민주주의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