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그러면 공원에서 십 분 정도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영이 보고 싶어 죽겠으면서도 혼자서 공원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153. 좋아하는 장소가 생긴다는 것은 마치 인생에 경력이 쌓이는 듯한 기분이어서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161. 내가 어딜 가는 길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중요한 듯 했다.
167.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 지 결정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모든 과정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고 그만큼 반응 속도도 늦다.
168. 나는 원래도 논리정연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늘 뭔가를 빼먹고 까먹고 헷갈리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사소한 실수 하나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 실수는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의 신빙성을 훼손해서 그걸 가짜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랐다.
177. 이 소설을 빈칸을 생각하며 썼다. 나에게 빈칸이 주어졌을 때 그 자리를 어떤 말들로 채울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일차적으로 내린 결론은 무엇이든 쓸 수 있다, 였다. 빈칸에 절대 들어가면 안되는 말도 있긴 할 텐데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끝없이 생각하면서 목록을 갱신해나가야만 하지 않을까. 사전이 실제 삶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