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p.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그날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고, 그건 전적으로 주호가 나를 배신했다는 기분과 관련이 있었다. 주호가 더는 연극에 헌신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가 우리일 수는 없으리라는 판단. 우리의 한 시절이 이토록 시시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결론. 나는 주호가 내 동의도 없이 함부로 커튼을 열어젖힌 곳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고, 갑자기 쏟아져들어오는 빛을 피하려는 것처럼, 모든 게 적나라해지는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처럼 테이블 밑으로 눈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