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히 여기던 것이 망가졌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긴한데...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는 걸 보니 생각만큼 덜 소중했던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조금씩 타협해왔던 것 같아요. 물질적인 것은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대답하는 동시에, 책을 읽으며 든 생각과 감정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남기려고 하네요ㅎㅎ
그럼에도 복원전문가에 맡기고 싶은 물건이 무엇이 있으냐는 질문에 답해보자면, 어린 시절 피아노 콩쿨대회에서 받았던 트로피입니다!
10살 즈음 어떤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콩쿨 대회에서 소나티네 4번 악장을 연주하고 받은 상이었습니다. 피아노 학원에서 돌림 노래처럼 자주 들리는 아주 쉬운 곡이었고, 피아노 선생님마저 상은 기대하지 말자고 할 정도로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연주했던 곡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정말 즐겁게 부담없이 연주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감정 상태가 통했던건지, 좋은 점수를 받고 상을 탔습니다! 그날을 계기로 저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극적인 이야기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즐겨도 된다'는 깨달음을 주었던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상으로 받은 건 바그너의 흉상을 본 따 만든 트로피였습니다. 높이는 30cm정도인데, 석고로 만들고 청동처럼 보이게 붉은 색을 덧칠한 것 같았어요. 초등학생이 받기에 너무나도 고급스러운 트로피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트로피가 동생의 실수로 깨진 것에 있습니다. '멋지다,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가족들의 이 손 저 손을 떠돌던 트로피는 하필 동생의 손에서 미끄러졌고, 바그너의 허리부터 반대편 어깨까지 쪼개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본드로 단단하게 붙여놓긴 했지만, 조각을 잃고 선명하게 남아버린 흉터는 그날의 뿌듯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기억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어디 안보이는 곳에 치워두진 않았고, 20년 넘도록 책 선반 위의 책들을 지키고 있습니다(북엔드의 역할이랄까요). 때때로 선반 위의 바그너가 '너는 무엇이든 가능한 존재야'라고 응원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친구가 앞선 20년처럼 다음의 20년도 거뜬히 버텨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