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퍼플.
'보라색'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책의 제목이다.
보라색은 직관력, 통찰력, 상상력, 자존심, 그리고 관용과 긍정적인 감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굳이 이런 내용을 찾아본 이유는 실상 이 소설에는 '보라색'과 연관된 이야기가 그다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 보라색을 좋아했었는데, 당시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하면 뭔가 우울한 감성을 지닌 아이로 찍히곤 했었다.
심지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색을 바꿔보려고 시도했을 정도.
그러니 사실 보라색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 등은 이 소설과는 크게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색이든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 전부와 연관 지어질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느꼈던 어떤 느낌들과 '통찰력, 관용, 긍정적인 감정'이라는 보라색이 가지는 의미는 잘 어울리기도 한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거의 대부분이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다.
각 인물들 간에 직접적인 대화가 드러나는 장면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과 상황 등을 전하는 편지글이다.
여기서 편지를 주고받는 주체는 대부분 언니인 셀리와 동생인 네티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들은 서로에게 긴 세월에 걸쳐 편지를 쓰지만 그 글이 상대에게 제때 전달되지는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셀리가 하느님께 쓴 편지는 과연 하느님께 제때 도착했을까도 궁금해진다.
뭐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니 굳이 편지를 통하지 않고도 셀리의 마음을 헤아리셨겠지만.
편지글로 진행되는 소설이기 때문에 사람의 심리나 상황이 세밀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현실이 한두 번은 걸려져서 글로 쓰여지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이 글 뒤의 실제 상황을 생각하면 몸서리쳐질 때가 많았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상황을 간략화해서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 안에 담긴 글로는 표현 못할 여러 가지 현실적인 상황들이 읽히는 느낌이라 더욱.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소설이었다면, 아마 중간에 책을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는 셀리, 네티 이외에도 슈그 에이버리, 소피아, 타시 등의 여성들이 나온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같이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들을 보인다.
흔히 말하는 '연대'의 모습을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그들은 조금씩 자신의 자아와 행복을 찾아나간다.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흑인 여자를 괴롭히는 것이 백인이 아니라 주로 흑인 남자라는 점이다.
가장 많은 괴로움을 당한 것은 역시 셀리겠지만, 다른 인물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흑인은 백인에게 차별을 받지만 흑인 중에서도 여성은 더더욱 차별받는다.
물론 백인에게 받는 학대와 차별도 있지만 흑인 여성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차별과 학대는 대부분 같은 흑인 남성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여성들은 자신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계급을 나누어 차별하지 않고 연대하여 결국 흑인 남성들도 변화시킨다.
셀리의 남편 00씨의 변화는 놀랍기까지 했으니까.
바느질을 하며 부인과 담소를 나누는 전 마초(!) 남편이라니.
하지만 인종 차별에 여성차별까지 더해진 상황에서 여성차별이 조금 덜어졌을 뿐이다.
소설 밖의 세상에서는 갈 길이 더더욱 멀고.
그래도 소설 속에서나마 그런 상황에 도달하기까지 한 여자의 대부분의 삶이 소비되었다.
거기다 책을 다 읽고 더더욱 떨칠 수 없는 궁금증이 있다.
그렇게 차별을 심하게 받아서 차별이라는 것이 안 좋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흑인 중에 오히려 더욱 모질게 황인들을 차별하는 사람이 있는 건 왜일까.
내가 당해봐서 안 좋은 걸 알았으니 그런 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도 당했으니 너도 한 번 당해보라는 심보의 사람도 분명히 있기 때문일까?
인종 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흑인만의 권리 같은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인종, 성별과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서로에 대한 연대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싶다.
코로나로 인해 힘들어진 시대이니만큼 더더욱.
넷플릭스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컬러 퍼플'이 올라와있으니,
이제 슬슬 이 영화도 한 번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