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은 장미' 에는 4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인데, 뉴욕이라는 도시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뉴욕을 포함한 미국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글을 통해 도시의 분위기를 상상하며 읽었다.
오히려 그 편이 이 글을 읽어나가는데 더 좋았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4편의 소설에는 각기 다른 인물들이 나와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놓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사람은 너무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게는 낯설어서 조금은 무섭기까지 한 뉴욕이 배경이라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서울은 하늘이 맑아도 미세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어놓거나 커튼을 열어놓기 힘들다면 뉴욕은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며 염탐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편함에도 커튼을 열어놓기 힘든가 보다 하는 느낌을 가졌으니 더더욱.
개인은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그것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걸까.
'아가씨 유정하기도 하지'에서 어머니, 딸, 아들은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해하려 노력하는 걸로 보이지도 않는다.
가족임에도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오죽하랴.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나오는 승아와 민영.
나는 둘 중 민영에 감정이 잘 이입되는 편이었다.
나도 내 삶과 나의 테두리 안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서 내 물건들까지 허락 없이 뒤집어놓았다면 더더욱.
눈치 없이 민폐를 끼치는 캐릭터라고 찍힌 승아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내게 미움을 받았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의 마마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과연 그는 돼지고기와 거짓말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그 역시 언어가 짧아서 그저 고개를 끄덕인 수진처럼 그저 자신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공간에서의 소외감은 더욱 큰 벽으로 느껴질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수진의 취미가 실제로는 관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요리가 되어버리는 과정이 너무나도 납득이 가니까.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에서처럼 나를 항상 여행객으로만 대하는 도시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내 성향상 뚫고 들어갈 생각 자체를 할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
어디선가 '둘이 같이 있으면서 느끼는 외로움이 홀로 있으며 느끼는 외로움보다 훨씬 강하다' 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언어도 문화도 같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뉴욕에서 느끼는 외로움보다 더 짙은 것일까.
아니면 외로움은 애초에 비교가 될 수 없는 감정인 걸까.
그 정답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최선을 다해 끌어안아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