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골목>
존재를 증명하는 일, 세상에 그것보다 위대하고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p 113)
깊은 밤 귀신이 지나가면 그 냄새를 맡기도 하던, 예민한 시절이었다....
죽음 속에서 길을 잃고, 죽음 속에서 길을 찾다니. 길고 짧은 생을 돌아 나온 기분이었다. (p 122)
어떤 기억은 오감으로 남는다.
오기를 부리듯 다른 레시피를 고집했던 것은 어쩌면 엄마와의 추억을 돼새기는 일이 아직은 두려워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헤어질 수 없는가보다. 죄 망친 여름 반찬을 꼭꼭 씹을 때마다 이도 저도 못 된 미움을, 설익은 후회를, 서걱거리는 미안함을 함께 삼킨다. 내가 던진 미움마저도 온전히 감당 못하는 내 옹졸함이 입속에 씁쓰레 감돈다. 엄마에게 심통 부린 날들처럼 올여름은 그렇게 조금은 씁쓸하게 지나갈 것 같다. (p 125~6)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서 남은 자들의 상처를 끝없이 복기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됐다. 내일 당장 어떤 상황이 생긴다 하더라도 오늘 하루의 자존과 존엄과 일상을 잃지 말아야 했다...
슬픔과 고통은 어떠해야 한다고 당사자도 아닌 타인이 만들어놓은 매뉴얼 따위는 신경 쓰지 말아야 했다. (p 129)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위로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위로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대신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살았다. 그러고 나니 홀연히 그 시절이 지나갔다...
열 길 물속보다 깊은 게 한 길 사람 속이고, 그중 가장 알 수 없는 게 자신의 마음이겠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의지도 희망도 보이다. 깨닫는 대로 걸으면 그게 운명이고 미래가 될 것이다. 신년운세? 다 필요 없다. 내 마음이 토정비결이다. (p 138)
선생님이 보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은 선생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추억에 바치는 도취성 그리움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나를 아꼈지만 나는 내 기억을 아끼고 있었다. (p 143)
삶이라니, 땀이라니, 땅에 대한, 농사에 대한 이해라니, 그 무엇 하나 가당한 것이 없는 오만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배웠다. 순간의 경험이, 체험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 지나가는 자는 머무는 자의 고충을, 행복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안다는 말은, 알겠다는 말은 매우 오만하고 경솔한 말이라는 것.
(p 148)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밭을 향한 것인지 열매를 향해서는 안 될 일. 그러니 밭만 가꾸어주고 열매는 간섭하지 말자 수시로 다짐하는데, 사춘기 농사가 여름 농사라 그런지 마음속 천불 다스리기가 쉽지는 않다.(p 150)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말하고 싶어 하면서 네가 누구인지도 내가 규정하고 싶어 하는 이기심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p 153)
삶이란 게 참 묘하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p 159)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시간은 유한하다. 길이로 따지면 그러하다. 그러나 그 유한함 안에 무수히 많은 가닥을 품고 있는 듯싶다. 아인슈타인의 상태성 이론에 대해 말할 때 종종 인용되는 비유가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간은 얼마나 소비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하는가가 중요한 것 아닐까. (p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