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골목>
책을 좋아한다는 건 성공에의 예감 같은 걸 전파하는 법이다. 내가 책에 빠져 있는 건 아빠에게도 자랑이었지만 엄마에게도 그랬다. 나는 책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했는데, 엄마와 아빠는 책을 좋아하는 나를 통해 미래로 도망가고 싶어 했다.(p 28)
대문이라는 게 그저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의 위용과 표식을 드러내는 어떤 구조물을 의미한다면, 골목에 있는 집들은 대문이 없다.(p 36)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 한 번 잃지 않고 살았던 나는 눈 한 번 휘두르면 끝이 보이는 넓은 길에서 오히려 막막하다. 꿈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좁아 담벼락이 어깨를 스치는 바로 그 길이다. 걸을 때마다 길 위에서 길이 그리워 나는 더러 눈물이 나기도 하다. (p 42)
그 꽃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이 벽 속에나 꽃을 가두고 있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상상인지, 모든 벽도 사실은 꽃을 품고 있다는 낭만적인 상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서러운 기분이었다.(p 44)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p 46)
지향하는 이가 없는 사회는 살아남지 못한다. 꿈꾸는 이들이 있는 한 문학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의 꿈이 미몽이나 추문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것은 문학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p 49)
그러고 보면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 사람의 의지 앞에서는 무색한 말이다. 고작 십 년, 강줄기나 산세는 어떻게 바꿀지는 몰라도 사람이 가지고 있던 꿈은 쉽게 바꾸지 못하는 듯싶다.( p 51)
세월은 가고 삶은 늙지만 꿈은 남는구나.(p 53)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실패와 차별을 개인의 노력 여하로 돌리는 사회가 가장 비겁하다고 여전히 믿는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모든 절망의 바탕에 개인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성공은 시스템의 문제일 수 있지만, 성취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놓친 성공 대신 당신의 패배가 이룰 성취를 기약하라고.(p 64~5)
되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모든 자리는 무모하게라도 시도했을 때 한 걸음이나마 앞으로 나아갔다. 염려하고 망설이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루고 성취한 일은 없었다.(p 71)
어쩌면 행복이란 즐겁고 만족 가득한 상태, 그 자체를 말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정지되고 멈춰있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생의 움직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낙천적이고, 그리하여 생의 곳곳에서 행복을 찾는 이들과 틈만 나면 삶의 비의를 찾는 이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움직임에 있는 것 같다.(p 90)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매튜 맥커너히는 오스카상 수상 당시 십 대 때부터 변하지 않았던 자신의 영웅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바로 매 순간으로부터 십 년 뒤의 자기 자신이었다.
“매일, 매주, 매월 그리고 매년. 제 영웅은 항상 저로부터 십 년이나 멀어져 있습니다. 아마 전 절대로 그 영웅이 되지 못할 겁니다. 갖지도 못하겠죠.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니까요.” (p 90)
터닝 포인트, 말 그대로 ‘전환점’이다. 그러나 그 전환이 보다 발전적으로 향하지 못한다면 그건 단순한 변덕이거나 포기일 수도 있다. 아니다 싶을 때 과감히 돌아서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삶의 소망은 문을 열었다고 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 그 문을 연 이후에 또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법. 어찌 방향을 바꾸는 것만 터닝 포인트일까. 한 단계 깊어지는 것은 변화가 아닌가. 삶이 제자리 뛰기라고 투덜거리지 말자. 잘만 뛰면 제자리에서 뛰어도 한 계단 위니까.(p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