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먼 곳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앞으로 누구한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할 만도 할 텐데 다들 자신들이 느낀 공포감을 과장하고 그 공포감을 흥밋거리로 삼아 이야기에 이야기를 더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p 129)
"새삼 이야기의 힘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 사람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 만한 이야기들을 모아 두는 것도 나중을 위해서 꽤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남의 속사정이나 나쁜 소식 같은 것들이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였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쉬웠고 나쁜 이야기는 흥미를 끌었다. 그러니까 결국, 멀리 그리고 빨리 퍼지는 소문의 핵심은 다름 아닌 타인의 불행이었다."(p 131)
"나는 솜이를 붙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솜이를 혼자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조용히 솜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솜이와 함께하는 것. 그게 그 순간 내가 솜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p 158)
"삼촌이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는데 이상하게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솜이 같은 능력은 없지만 삼촌에게는 다른 힘이 있었다. 친절함, 상냥함, 다정함 같은 것들이 그 정도의 힘을 가지는지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때 삼촌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아는 향, 내가 들어본 향이었다. 요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향기. 요정이 흘리고 간 체취. 그건 바로 옅은 코코아 향이었다."(p 166)
"추락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두 사람을 불러 도대체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자존심. 그래, 자존심은 이럴 때 세우는 거다. 나 같은 사람이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게 바로 자존심이다."(p 179)
"전교생이 내게 반감을 가지더라도 반전의 기회는 노려 볼 수 있다. 그치만 나에게 아무 정보도 없다는 사실을 들켜 버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그걸로 게임 아웃. 만천하에 내 왕 노릇이 끝났음을 선포당할 터였다. 버티자고 마음먹었다. 아직 끝이 아니니까. 시련은 끝이 아니라 도약의 발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더 나빠질 줄도 모르고."(p 181)
"아이들은 박선희에게 공감하고 박선희를 동정했다. 아이들과 박선희는 어느새 '우리'가 되었고, '우리'가 무슨 힘이 있었겠어,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 하고 입을 모으며 서로 손을 잡아 주었다. 그렇게 힘을 합친 '우리'는 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는지 급기야 나더러 '우리' 힘을 다시 내 놓으라며 난리를 쳐 댔다. 돌려주고 싶어도 이젠 돌려줄 힘도 없는데 말이다."(p 186)
"사과해.
나한테, 우리 엄마한테, 그리고 독고솜한테, 그동안 태희 네가 괴롭힌 모든 사람들한테 사과해."(p 191)
"엄마가 내게 거는 기대, 그러니까 엄마만큼은 가뿐히 해내리라 믿는 게 싫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과 그런 기대를 싫어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p 205)
"그날, 나는 엄마가 가르쳐 준 세상의 이치를 폭풍 같은 눈물로 몽땅 게워 냈다. 그리고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p 207)
"영미 생각을 한답시고 내 생각을 먼저 했던 거 같아. 나도 뭔가 하고 싶다고, 내가 영미랑 가장 친한 친구인데 영미를 위한 일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다고. 평소 영미한테 말도 안 걸던 애들이 갑자기 나서서 영미를 위해 뭔가 한다고 하니까 배알이 꼴렸나 봐. 그래서, 그러면 안 됐는데, 경쟁하듯이 분위기에 휩쓸렸다."(p 213)
"먼지를 그리 많이 날린 건 아니라서 열심히 자신을 되돌아보다 보면 오래가지 않아 괜찮아질 테지만, 제대로 반성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먼지가 살과 내장을 파고들어 영원히 몸속에 박혀 버릴 거라고 했다."(p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