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시집의 대문을 열며 검지 손가락을 펴고 제 심장께를 가리킨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한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너무나고 당연하게 느껴져, 그럼 그걸 네 마음이라고 하지 달리 설명할 말이 있냐? 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문장의 겉껍질만 본다면 그렇다. 허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볼까. 시인은 “이걸 내 ‘심장’이라고 하자”라거나 “이걸 내 ‘좌심방과 우심실’이라 하자”라는 표현을 고르지 않았다. 의학적 사실이나 사회적 통념, 혹은 사실 적시적 서술을 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제 감정의 존재를 확인하고, 재정의하며, 명명한 것이다. 그 과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감정을 인지한다. 시집의 중문을 열며 시인은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당신이 먹었습니다//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추상적 경험을 언어화하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그 방식을 통해 시인은 삶을 이야기로 변환한다.
특히 시인은 마지막 작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독자를 배웅한다. 유년기를 함께 지냈던 친구 ‘용수’에 대해 설명하며 ‘주말 아침’부터 ‘저녁의 귀갓길’까지 오랜 시간의 흐름 내내 하루의 절반 이상을 같이 보낼 만큼 각별한 친구 사이였음을 설명한다. 단순히 시간만 죽이는 것이 아닌 함께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음을 드러낸다. 여기까지의 정보로는 ‘용수’가 어린 시절의 노스텔지어를 불러 일으키는 소꿉친구처럼 느껴지는데, 시인은 마지막 연에 다다라 용수에게 다른 이름표를 소중히 달아준다. “누가 내게 첫사랑에 대해 물으면/나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며, ‘용수’가 단순한 친구가 아닌 ‘첫사랑’이었음을 밝힌다. 이것이 시인의 마음이었을 테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김춘수 시인이 <꽃>에서 말했던가. 시인은 무화과 과육 같이 여리고 오믈렛처럼 뭉글한 어떤 감정을 발견하고 '마음'이라 명명했다. 그렇게 이름 없던 감정은 '마음'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