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과 냄새, 습기로 남은 지난날
내게 권여선 작가와의 첫 만남은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창비, 2007)로 기억된다. 중앙일보 기자가 당시 촉망받던 젊은 소설가들에 관해 연재한 글을 묶은 『손민호의 문학터치 2.0』(민음사, 2009)를 읽다가 권여선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소개 글이 워낙 매혹적이었던지라 거기서 대표적으로 언급된 이 소설집을 구입해 읽은 것이었다. 오래전에 읽어서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특유의 개성 넘치고 맛깔스러운 묘사만은 뇌리에 강렬히 남았다. 「가을이 오면」에서 “그녀가 길바닥에 쓰러져 너울거리는 공기 너머로 본 것은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긴, 이를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이었다”(18쪽)라는 구절을 읽고 몹시 궁금해진 나머지, 그때까지 살면서 맛본 적 없는 순댓국을 먹어봤을 정도다. 그 후로 권여선 작가에게 꾸준히 관심을 두었지만 그리 부지런한 독자는 아니었는지 단편 위주로 읽었을 뿐이고 장편은 읽은 기억이 없다. 호평이 자자해 벼르고 있다가 『각각의 계절』을 읽고는 흡족해하며 다른 작품도 읽어보리라 생각하던 차에 첫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가 개정판으로 나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일단 작품을 읽으며 줄곧 염두에 둔 건 발표 연도였다. 작가가 삼십대 초반이었던 1996년에 처음 발간된 이 소설은 사십대 초반이었던 2007년에 다시 나왔다가 예순에 가까워진 올해 한국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비로소 내 손에 쥐어졌다. 등단작을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살펴보며 손봤을 작가의 심정이 새삼 궁금해졌달까. 초판을 입수해 비교하며 어떻게 달라졌나 살펴보면 재밌지 않을까 싶은데, 뭔가 악취미를 가진 얄궂은 독자라 여겨질 것도 같다.
한편, 여러 창작자의 마감 분투기를 엮은 『마감 일기』(놀, 2020)에서 읽은 권여선 작가의 글도 떠올랐다. 등단 이후 7년 동안 원고 청탁이 끊겨 여러 일감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는 사연이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이 『푸르른 틈새』 발표 이후 “허울뿐인 소설가”로서 고뇌의 세월을 살아오셨던 거구나 싶었다.
서른 즈음의 주인공 미옥이 이사를 일주일 앞두고 인생의 각 시기를 회상하며 전개되는 이 소설은 자연스레 옛 추억에 잠기게 해주었다. 마침 장마철에 이 책을 읽어서 그런가(기후위기 때문인지 장마철이라기엔 좀 아리송한 느낌이지만) 습한 자취방 묘사가 더욱 피부로 와닿는 듯도 했다. 부모님이 지방으로 내려가시면서 나는 서울과 경기도 각지로 거처를 옮겨다니며 이십대를 보냈는데, 엘리베이터 없는 5층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 데 이어 반지하 집에 살면서 습기와 곰팡이로 고충을 겪었던 일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아침해에 잠이 깰 수 없어 답답해했던 기억, 창밖으로 지나가는 길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곤 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났고. 두 집 모두 열악했기에 떠날 때는 마음이 마냥 후련해질 줄 알았건만, 한 시절을 보낸 정든 공간과 영원히 작별한다 생각하니 왠지 쓸쓸해지고 울적해지기도 했다. 익숙해진 공간을 떠남으로써 삶의 한 시기를 일단락 짓고 새로운 단락으로 옮겨갈 때 느끼는 여러 상념이 이 소설에서 유독 섬세히 그려졌다는 생각이다. 사랑받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미옥의 욕망과 결핍과 상처, 여성성을 동경하면서도 중성성을 추구하는 모순적인 모습 등은 옛날의 미숙한 나를 겹쳐 보게 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미옥이 인생의 각 시기에 만난 친구들, 즉 열한 살 시절의 해수와 민자, 윤아, 대학 시절의 명호, 종태, 한영, 수진, 미혜 등의 외양과 언동, 심리 묘사도 흥미진진했다. 복학 후 다시 만나 사귀게 되는 한영의 ‘호리병’ 같은 얼굴은 대체 어떤 얼굴인지 궁금했고, 시선을 피하고 싶을 만큼 게걸스럽고 추접스럽게 먹는 그의 모습은 너무 실감 나게 묘사되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영과 헤어지면서 복잡한 심경 변화를 겪는 미옥의 마음에 감정이입을 해보고 미옥이 회상하듯 지금껏 인연을 이어가는 이들, 혹은 소원해져 간혹 근황을 접하거나 아예 소식이 끊긴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미옥의 집에 몰려와 한동안 얹혀살았던 외가 쪽 친척들, 그리고 그들이 합심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장면, 그 음식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또한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로 많은 이의 군침을 돋웠던 권여선 작가의 내공이 일찍이 빛을 발했구나 싶었다.
미옥의 가족은 물론 외가 식구까지 먹여 살리던 아버지가 실직 후 위상이 추락해버리고, 바람난 남편을 욕하던 첫째 이모네가 팔자가 피면서 입장이 뒤바뀌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사람 앞일은 알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건 없구나 하는 씁쓸함을 곱씹게 해주었다. 해수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접한 미옥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은 이런 씁쓸함에 슬픔까지 더해주었다. 시청역 부근에서 일어난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홉 명이나 사망한 뉴스를 접했을 무렵에 이 대목을 읽어서인지 무척 공교롭고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다시금 살아갈 의욕을 되찾은 미옥은 이사를 하루 앞두고 의식을 치르듯 치킨수프를 맛본다. 초반에 등장한, 암소와 맞바꾼 냄비 민담에다 푸른빛, 따뜻한 치킨수프와 그 냄새, 젖은 방의 습기라는 오감을 일깨우는 이미지들이 어우러지면서 이 소설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다음날 이사를 떠난 미옥은 이후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미옥의 미래는 어떤 색과 향으로 물들어갔을까? 이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고민과 방황의 시기를 아프게 지나온 미옥의 앞날을 응원하고 싶어지면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하다.(308~3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