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때때로 치미는 추악한 마음을 없던 것으로 하고 싶을 때 이야기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준다. 숭고한 이야기를 읽을 때면 다른 내가 될 수 있다. 도저히 어떤 마음은 긍정하고 싶지가 않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마음, 진실을 외면함으로써 상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안달하는 마음, 가까운 이의 고통을 못 본 척하고 싶은 마음, 자기 연민에 빠져 모든 것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 그런 못난 마음마저도 어여삐 여겨달라는 식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참을 수 없이 구역질이 밀려오곤 한다. 내 안에도 있을 그런 욕망들이 누군가의 입을, 눈을, 손을 빌려 말해지고 있는 것마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싫을 때가 있다. 도망치고만 싶은 비겁한 마음을 긍정하는 순간 현실에 간신히 발붙이고 있던 다리의 힘마저 풀릴 것만 같다.
그런 마음들에 내내 흔들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지막 이야기들>에 있었다. 긍정할 수는 없었지만 버릴 수도 없었던 마음을 하염없이 품고 있던 이들의 이야기가. 도망치고픈 마음을 한순간도 잊지 못하지만, 도망치지 않은 끝에 마침내 평온을 얻은 이들의 이야기다. 여기서 ‘평온을 얻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험, 감정의 응어리를 깨끗이 털어내는 경험. 어느 훌륭한 성장소설 속 모험의 대단원을 맞이한 주인공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그 기회는 윌리엄 트레버의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작품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버텼는지‘에 대한 얘기 또한 그려지지 않는다. 분명 수없이 발버둥치며 고뇌했던 순간들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 이야기들>은 풍랑의 정점을 지나고 남겨진 순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다리아 카페에서> 속 애니타는 자신의 남편과 외도를 저지른 클레어를 끝내 용서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고도 줄곧 생각해왔을 것이다. 비록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삶을 지속해왔을지라도. 클레어가 떠난 뒤 그녀는 다리아 카페에서 문득 생각한다. 클레어 역시 사랑을 우선한 삶 속에서 애니타와의 우정으로 충만했던 시간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클레어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애니타가 그녀를 용서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애니타가 방문하는 다리아 카페에는 그렇게 고독한 평온이 자리잡는다.
<겨울의 목가> 속 메리 벨라는 자신의 연인이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사랑했던 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메리는 결국 다시 한번 그를 잃는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과 충만했던 시간들은 무엇 하나 훼손되지 않았다고 믿기로 한다. 그것이 이내 이어질 일꾼들의 쑥덕거림 속에서도 그녀가 획득할 평온이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속 올리비아는 언니의 연인을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그 추악한 마음마저 보아줄 사람이 없다면 서사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죽음의 드라마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어떤 고통은 낭만의 수의를 입기엔 너무 둔감하다는 걸 자신은 알고 있었다는 것도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용기가 그 별것 아닌 일에 마법을 걸 수도 있었으나, 용기도 상대방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본문 153쪽)“
<여자들> 속 서실리아는 격변의 시기에 불쑥 들이밀어진 진실에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자신의 모친은 외도로 집을 떠났으며, 자신은 두 사람의 자식조차 아닐지 모른다는, 참혹하기 그지 없는 진실. 서실리아와 같은 시기를 겪어냈을 터인 아버지는 그녀에게 유예의 시간을 준다. 잔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공상 속에 잠겨 있을 시간을. 서실리아는 잠시 자신을 둘러싼 일들이 완전히 다른 방향의 허구일 수도 있다는 공상에 빠져본다. “그런 허술한 가정과 짐작이 서실리아의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떠나지 않았다. 분명하고 거의 확실한 것에 불안하게 도전하는 그 추정들은 애매하고 미숙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엄연히 존재했고, 서실리아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그 의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본문 240쪽)”
이어지는 마지막 이야기들 속에서는 그 어떤 문제도 완벽히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에게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삶의 모든 부조리와 불가해가 결국 자신 안에서 나름의 논리와 완결성을 갖추는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 윌리엄 트레버의 글을 읽으면 그 순간을 기다리고만 싶어진다. 모든 풍랑이 가라앉고 새로이 태어나는 순간을. 당분간은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내게 그런 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먼 곳에서 관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아하고 침착한 내 모습이 있기를 갈망할 수 있을 뿐이다. 영웅 서사도, 성장 서사도 아닌 이야기를 또다른 도피처로 삼아야 하는 순간을 견디면서.
“그 음악의 미스터리는 그가 연주를 마치고 그녀의 인정을 기다리며 지은 미소 속에 있었다. 그리고 미스 나이팅게일은 그를 바라보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 깨달았다. 그 미스터리 자체가 경이였다. 그녀는 거기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이 사랑과, 혹은 천재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는 데만 너무 골몰했으니까. 균형이 이루어졌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 본문 17쪽)
언젠가 이 모든 일들이 내 안에서 고요히 가라앉는 순간들을 갈망하면서, 부유하는 침전물 사이를 헤매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