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 날엔가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선영 같았다. 사명감도 있었고 잘 해내겠다는 각오도 있지만, 솜씨가 서툴고 실력이 부족하던 때. 5년 쯤 일을 하고 나니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진영과 같은 마음으로 지냈다.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련한 체 했고, 스스로도 나를 노련한 줄로 믿었던 것 같다. 세상을 다 간파하고 이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던 지난 날의 오만함. 영원히 자라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어느 샌가 경력 15년차, 순오의 시간에 와 있다. 소설은 순오를 중요하게 조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순오의 마음이 궁금했다. 진영에게 가르쳐주던 판에 박힌 말이 언젠가는 정말 마음을 담아 했던 말이었겠지. 이제는 팔리는 제품을 좋아하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진심을 다해 회사의 운명을 고민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10년 정도가 더 지나면 나도 필시 '본부장'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식사 자리에서 어린 후배들에게 건배사나 시키고 별반 쓸모도 없는 말이나 지껄이는데, 그 또한 그 자리에서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민을 지고 있을 것이다. 지나온 시간의 기억은 희미하고 가지 않은 시간은 모호하기에, 자라면 자랄수록 누굴 함부로 판단하거나 재단하기는 어렵다고 느낀다. 다만 살아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