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
종묘 해설사 이도는 불타버린 정전을 바라본다. '확률이 낮지만 충분히 가능' 했던 큰 지진이 서울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복구는 생존이 달린 문제를 우선순위로 놓았고 종묘의 문제는 뒤로 밀렸다.
"모두에게 일어난 비극이었지만 내용과 상실의 감각은 제각각이었다. 모두가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한순간에 잃었다....
가치의 문제는 생존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는 무가치이다."(p 238)
살아 있는 사람도 갈 곳이 없어 난리인 와중에 '가치'란 단어는 공허하다. 사람들의 무관심은 잔인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 없다. 설명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피하는 이도와 달리 야간 경비원 서유성은 자신의 개인적 감정과 감상을 곁들인 해설을 이어간다.
"종묘가 이런 일 겪는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
기억하는 이들이 있고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 한 어쨌든 복구될 거고 다음 세대로 전승되겠죠. 선배, 전 복잡하게 생각 안 해요. 그때까지 우린 우리 일 하면 돼요. 난 지키고 선배는 알리고."(p 245)
진정 역사를 사랑하는 서유성의 눈빛에서 체념과 슬픔이 읽어진다. 그것이 진심이라서 더욱 슬프다.
"밤은 초라한 것을 가져주는 아름다운 옷"(p 254)
"지킬 것은 없지만 돌볼 것은 있잖아요. 전 밤마다 돌아디니면서 계속 그들에게 말을 걸어요. 여기 있다는 것을 안다고. 기다려 달라고. 그렇게 말해요 어딘가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영혼들이."(p 255)
길냥이 '스노우'가 정전에 찾아온 지 석달쯤 되었다고 한다. 신들과 고양이는 서로를 돌봐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과 백자가 밥그릇인 고양이는 격조마저 느껴진다.
"감정은 장소다."(p264)
진짜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것이 눈앞에 없을 지라도 내 감정의 장소에서 그것을 계속 기억해내고 되살린다면 그것은 항상 내곁에 있을것이다. 스노우는 영물이므로 지금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도 마음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한다면 좋아하는 것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