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면 이미 가보았을 길일 수도 있고 걸어도 걸어도 처음 가본 길일지도 모르다. 그런 산책을 여러 번 그려 볼 것이라는 작가의 말. 부산비엔날레의 의뢰를 받고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에 대해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한다. 텐트 연극 <야전의 달> 극작가 사이토 마리코는 1982년 여름 한국에서 여행하다 보수동 부산 애린 유스호스텔에서 묵으며 산책했던 기억이 가장 좋았던 기억이라 한다. 82년은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해이기도 하지만 교과서 문제가 큰 화제가 되어 양국의 불편함이 극대화된 해이기도 했다 한다.
여행을 마치고 나는 이제 당분간 한국에 가면 안 되겠구나 생각을 했다. 누구나 냉전 구조 속에 갇혀 있으며 나는 그 누구도 도와줄 힘이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때 나는 어떤 미래를 연습하고 있었던가.
지금이라는 시간이 미래에도 과거에도 통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멋지고 동시에 슬픈 걸까. 그러나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 하고 작가는 묻는다.
미래 산책 연습, 문학동네, 박솔뫼, p 245(사이토 마리코 추천사)
현재란 단순히 지금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사이에 누군가가 줄기차게 계속하고 있는 연습의 시간인지도 모른다.(p245) 작가는 단언하지 않고 사실과 현실, 진리 사이를 왕래한다. 산책하러 나온 홀가분한 모습으로.
한 시대를 절실히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은 어느 시대의 어디에서든 누군가의 연습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이토 마리코의 추천사는 이 책을 어떤 식으로 읽어내야 할지 어렴풋이 깨닫게 해준다.
끊임없이 먹고, 자고, 마시고, 생각하는 미래 산책 연습 속 주인공처럼,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산책 다운 산책을 한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서울 살면서 덜컹 부산에 월세를 계약하는 '나'처럼 나 또한 즉흥적인 결정을 내려서 어떤 계기를 만든 적은 없었나 생각해 본다. 어쩌면 코로나로 무산된 미국행에 그렇다면 부산으로 이사 가자는 무모한 결정이 그녀의 결정과 참 잘 맞물린다 싶기도 하다. 나의 결정도 나의 미래를 아름답게 이어가는 연습이기를... 그러면서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고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한 이야기를 되새길 수 있는 진정한 나만의 산책길을 한번 시작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