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하는 일 중에 내가 아직 잘 모르는 것이 또하나 있다. 과학자도 에세이를 쓰는가 하는 것이다. 책을 쓰는 과학자도 있지만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책을 쓰더라도 대개는 전문적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책이나 대학의 교재를 집필한다. 하지만 그런 책을 쓰기에는 스스로가 아직 너무 초짜라고 여기는 일종의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초보 연구자의 고군분투기를 쓰기에는 허구한 날 연구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나의 삶이 지나치게 단조롭다. 나는 좀 처럼 실험실에도 들어가지 않고, 천체 관측을 위해 오지의 천문대로 떠나지도 않으며, 남극이나 우주에도 가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체 어떤 책을 쓴다는 거야?' 원고를 쓰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질문을 오래도록 품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책장에 꽂힌 김중혁 작가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안갯속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떤' 책이 되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