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리에 사는 앨리시어. 키우는 개는 잡아먹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자식들을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일삼는 엄마는 씨발이라는 욕을 달고 산다. 똥 싼 동생은 엄마에게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동생을 때릴 때 제정신이 아닌 엄마를 보면 마치 짐승같아 보였다. 앨리시어의 주변을 보면 왜 상스럽고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는 ‘씨발’을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된다.
동생이 질식해 사고로 죽은 후 마을 사람들은 재개발에 문제가 될까 학대가 아니라 부모기 훈육한 것이라 옹호한다. 진짜 욕이 나올 판국.
몸집이 커지면 엄마를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고 견디다 못해 도움을 청하러 상담사를 찾아간다. 헌데 상담사는 피상담자에게 무엇을 해라, 하지마라고 행동적인 지침으로 조언을 해줄 수 없다고 말하며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한다. 부모님이 가해자인 것을 듣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돕고 싶은 마음이 없거나 책임 회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읽는 내내 그들의 대응에 화가 났다. 본인이 할 수 없다면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이관을 시켜서라도 할 수 없었을까. 앨리시어는 집도 사회도 모두 욕같이 느껴졌을 꺼다.
파스텔톤의 표지와 달리 너무 슬픈 내용이었다. 학대받는 앨리시어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의 표정, 모습으로 바라만 보기보다 관심을 가지는 것. 그들도 벗어나고 싶어했음을. 폭력자를 이해해보려고도 하고. 참고 또 참으며 자신이 폭력에 대응할 수 있을 거라 상상도 했지만 결국에 홀로 긴 싸움을 버티며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앨리시어. 그들을 알게 된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적극적이지는 못해도) 그들 편에 서서 희망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