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와 정조에 대한 글과 영상 매체는 꽤 여러번 접했다.
그래서 독파 챌린지 목록에 이 '권력과 인간'이 올라왔을 때도 굳이 읽을 필요가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역사 관련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지라 챌린지를 신청했고, 결국 읽게 되었다.
428페이지라는 꽤 두꺼운 책이지만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내용이 흥미진진했다.
영조와 사도세자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부제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본 조선 왕실과 권력의 속성을 다루고 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궁에서 한평생을 보낸 노회한 여성이자신의 집안을 위해 뒤늦게 변명처럼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다지 좋게 보지 않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혜경궁 홍씨는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위해 남편이 죽도록 내버려 둔 악처 같은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한중록'만을 인용하여 진행하지 않는다.
'영조실록' 등과 같이 비교 가능한 다른 책이 있으면, 그 책들까지 다 살펴가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한중록의 모든 것이 다 진실이라고도, 다 거짓이라고도 이야기하지 않고 당시의 상황과 다른 책들과의 교차 검증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저자는 자신이 저술한 이 책의 내용에도 오류는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저자의 태도 때문에 이 책의 내용에 상당한 믿음이 간다.
지금 영조나 사도세자, 정조가 다시 살아나 당시의 일을 회상한다고 해도 각기 자신의 입장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테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당시의 입장으로 되살려보려 노력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정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그 이미지가 상당 부분 바뀌었다.
영조는 출생에 따른 심한 열등감, 그리고 편집증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을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 책을 통해 본 영조의 모습은 그 이상이었다.
'사도' 같은 영화를 보며 영조가 종묘사직과 나라를 위해 사도세자를 어쩔 수 없이 죽이기는 했지만 후회는 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정말 말 그대로 산산이 부서졌다.
아들을 죽이고 돌아가는 길에 승전가를 연주했다니.
사도세자도 그렇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자라 결국은 정신에 문제가 생겼지만 나쁜 사람인 건 아니었겠거니 했지만, 실상은 나쁜 놈이었다.
아무리 당시가 신분제 사회이고 자신의 신분이 높았다고는 해도 사람 목숨을 너무 우습게 알았다.
자신보다 신분이 낮았던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에서 정말 정신병 때문인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는 결국 죽이지 않았으니까.
분노조절 장애는 설사 상대가 마동석이어도 조절이 안돼야 진정한 장애인데, 사람을 봐가면서 죽였다면 그건 정신병이 아니라 그냥 사이코패스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먹을 것을 너무 좋아해서 소아비만이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심지어 그 덩치로 인해 일반적인 뒤주에는 들어가지도 않아서 큰 뒤주를 공수해 왔다는 걸 읽으며 배우 유아인의 모습으로 떠올리곤 했던 사도세자의 이미지도 부서져버렸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정조에 대한 이미지가 가장 많이 바뀌었다.
정조로 떠올리고 있던 이미지는 '바람의 화원'에서 배수빈이 연기한 정조였는데,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초상화가 완성되자 감격해서 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순왕후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도 주변 공기는 긴장으로 팽팽하던 장면들도 그렇고.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정조 또한 자신의 부인에게 영조 이상으로 냉랭했으며,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는 죽기 얼마 전에 어영부영 역적 명단에서 빼주기도 하는 모습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막연히 효자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머니까지 속이는 모습에서도.
정조 역시 사도세자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자신은 달이고 자신이 빛을 비춰주어야만 사물들이 드러난다는 의미의 글을 궁 여기저기에 붙여놨다는 것만 봐도 그 성향을 알 수 있긴 했다.
특히 자신의 아버지,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해 역사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좀 실망했다.
나 역시 정조가 해놓은 그 역사왜곡을 바탕으로 사도세자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것도 꽤 됐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실 그대로를 알고 있을 때에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2차 대전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원폭으로 인한 피해만 강조해서 가르치고 있는 일본을 비웃지만 우리는 모든 역사에 진실한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아득해진다.
그러고보니 영조, 사도세자, 정조 모두 정상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있다.
그들은 가족이니 가족 내력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권력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여러 궁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상황이 좀 나아지면 이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여러 궁들을 구경 다녀볼 생각이다.
마침 서울대 병원 검진 날짜가 다가오고 있으니,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의 흔적들도 한 번 찾아봐야겠다.
책의 설명을 잘 읽어뒀으니 찾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