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데뷔작 <쇼코의 미소>에서부터 최근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까지, 모든 작품을 두 번씩 읽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내게 무해한 사람>이다.
사실 이 작품이 더 특별해서는 아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비슷하다. 최은영 작가는 작품들에서 관계와 소통, 감정의 전달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강점이 있다. 어쩌면 보편적일 수 있는 일들 혹은 일상의 일들도 그의 손을 거치면 좀 더 섬세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과잉되지 않는다. 뭔가 터지는 것이 없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긁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마냥 마음이 편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담담하게 서술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도 뭔가 불편함이 있었다. 그 불편함은 관계의 불편함일 수도 있겠고, 상황의 불편함일 수도 있겠고, 제도의 불편함일 수도 있겠다.
특히 그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여성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하기에 페미니즘 작가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작품 내에서 특별히 페미니즘을 더 내세우려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을 따름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여성의 이야기가 좀 더 섬세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니까. 물론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측면도 제기할 수 있겠다.
다른 작품과 결이 조금 다른 것 같지만 <601, 602>은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가족의 모습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효진의 이야기를 통해 가정 내 폭력의 현실과 그에 따른 사회의 무관심을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최은영 작가는 매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 단편들마다, 단편집마다 인물들의 감정과 대사와 서사를 꾹꾹 눌러 담는 듯하다.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일 것이다. 오해와 불편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이 지속되는 한 관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관계도 단절될 수 있으니.
하지만 믿음이 있는 경우에도 관계가 단절될 수 있을까? 다른 상황 때문에? <아치디에서>는 그러한 것처럼 느껴져서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래로 지은 집>도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고.
제목의 '내게 무해한 사람'은 내게도 해당될 수 있는 말 같다. 나도 다른이들에게 그러려고 하니까. 하지만 그 속에 있는 복잡한 감정들은 표현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 담겨있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고 공감이 되는 건 그들에게 나의 감정들이 이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