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고통스러운 삶을 예견하는 거창한 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게도 독서란 일종의 제의(祭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책읽기란 오래전부터 내게 또다른 세계와의 만남, 일종의 접신(接神)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1년간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곳은 내게 이미 ‘다른 세계’여서 굳이 책읽기를 통해 또다른 세계를 꿈꿀 이유가 없었다. 대신 나는 뉴욕 구석구석을, 서점을, 낡은 책들로 가득한 헌책방을 탐험하며 내면의 성채를 쌓아올릴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책이라는 오래된 친구를 만나고 다녔다.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