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도 책으로 먼저 배운 탓인지, 누구의 작품인지, 어느 시대의 작품인지를 알아맞추는 것이 재밌어서 시작했다. 출장과 여행 중 틈틈이 미술관을 다니게 된 것이. 물론 그러면서 미술품 감상이 너무 좋아지긴 했지만, 작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키울 기회는 희박했다. 그저 모르는 작품을 보고 회화 기법이나 색감을 유추해 작가 맞추면 그걸로 좋아서 방방방.
가끔 고갱이나 드가 등의 작품을 보면서 묘하게 불편한 감정이 들긴 했다. 하지만 ‘유명작가의 유명 작품‘ 이고 시대 버프 반영해서 보면 좋은 게 좋은거지 싶어 더 깊게 그 불편함을 들여다 볼 생각을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 불편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었다는 것을.
저자는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이제 더이상 위대하지 않다‘ 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몇 줄 더 추가하자고 말한다. 비너스는 장구한 역사 속 여성 아름다움의 대명사였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체모도 없고 체액도 없이 매끈하고 정갈한, 가슴과 음부를 가려 시종일관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의식하며 서 있는 모습은 진짜 여성의 모습도, 여성이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고.
책을 읽는 대부분의 시간 공교롭게도 피렌체에 있었다. 책에서 언급된 ’메디치의 비너스‘ 와 보티첼리가 그린 꽃들에 파묻힌 여성들의 모습 앞에 다시 섰다. 그저 눈부시게 아름답다 생각했던 시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피치 복도에 서 있는 수많은 조각상들 중 여성의 모습을 한 작품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어딘가를 의식한 듯 가리고, 수줍어 하는 모습, 19세기 전 제작된 위대한 작품 중 ’흑인’ 을 찾아볼 수 없음을 알아차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뇨리아 광장의 <사비나 여인의 겁탈> 은 여전히 수많은 고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하루에 몇 십 몇 백만 장의 카메라에 담긴다. 강간당하는 여성의 조각이. 모성 외 여성의 모든 욕구를 지운 수많은 성모자상은 오로지 고귀한 예술 작품인가? 이 불편한 질문을 하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이 불편한 질문을 했어야 한다는 자각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작품의 설명에 추가되기까지 또 얼마나 오래 걸릴까.
본격적으로 미술사 공부를 하기 전 탐구에 중요한 방향이 되어 줄 책을 만나 기뻤고, 무엇보다 안도했다. 나는 이제 더이상 비너스를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내 세상 속 아름다운 비너스를 잃었지만, 비너스의 그늘에 가려진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