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햄닛>이다. 누가 들어도 <햄릿>이 연상된다. 그렇다. 햄닛은 햄릿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당시에는 그런 표기법과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햄닛이나 햄릿이 혼용되었다고도 한다. 즉, 동일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햄닛은 누구인가. 햄닛은 윌리엄의 아들이다. 딸 주디스와 쌍둥이. 그러나 햄닛은 열한 살에 역병으로 죽는다. 어떤 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작품 내에서도 그 병이 전파된 유래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서술되고 암시되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윌리엄은 그의 아들의 죽음을 <햄릿>이라는 연극작품을 통해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다. 그것이 이 책의 줄거리다. 그의 바람대로 <햄릿>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그리고 베스트셀러로서 사람들에게 계속 기억되고 있다. 아마 인류가 존속하는 한 그 이름도 그렇지 않을까.
이 작품 <햄닛>에서는 1부에서 두 개의 시간축에 따른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펼쳐진다. 하나는 현재 시점으로서 햄닛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 하나는 과거 시점으로서 윌리엄과 애그니스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됐고 결혼생활을 했는가 하는 이야기다. 반복되는 두 이야기는 햄닛의 죽음의 시점에서 다시 합쳐지고 2부에서는 그 이후의 일들이 그려진다.
하지만 전체 분량으로 봤을 때, 1부가 2/3, 2부가 1/3 정도가 되고 분위기도 많이 달라진다. 1부는 앞서 말한대로 두 가지의 시간축으로 전개되다 보니 여러 이야기가 뒤섞인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의 중심에는 모두 애그니스가 있다. 실제 이름은 앤 해세웨이라고 하는 애그니스, 작가가 앤의 외할아버지의 유언장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앤 대신 애그니스라는 이름을 썼다.
작중에서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연구도 많이 있고 그의 가족사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들은 있지만 여전히 수수께끼인 부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분들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웠다.
늘 당당하고 확신에 찼던 애그니스의 모습은 햄닛의 죽음 이후 실의와 절망에 찬 모습으로 바뀐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도 이어진다. 그런 모습들은 주로 2부에서 그려져 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윌리엄은 비중이 아주 적고, 그 이름조차 얼마 언급되지도 않는다. 초반에는 '라틴어 선생' 정도로만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애그니스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건 마지막 부분까지 그러했다.
그러다보니 윌리엄이 어떻게 햄닛의 죽음을 <햄릿>으로 썼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가 고뇌했던 내용들은 스쳐가듯 지나가고, 클라이막스 부분인 연극 공연에서 애그니스가 분노에서 이해와 수용으로 변하는 과정이 짧게 서술되었을 따름이다. 이 부분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가 한 번에 터뜨리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연극도, 이 작품도 그렇게 마무리된다.
그래서 뒷부분이 좀 아쉽다. 2부의 내용에서는 윌리엄의 비중을 좀 더 늘리고 그의 고뇌를 더 자세히 그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애그니스의 몇 가지 생각으로 정리해버리기 전에 독자에게도 그런 기회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가 <햄릿>의 내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생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부차적인 것을 덜어내는 대신 한 점으로 집중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그 뒤의 이야기는 모른다. 애그니스는 어떻게 변했을지, 윌리엄은 어떻게 되었을지. 윌리엄은 극작가로서 대성공을 하고 은퇴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 시간동안 그 가족들은 각자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았을까. 아마 여전히 서로 말하지 못하는 금기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행복하게 살았기를 바란다.